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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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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제60회 수상자

특별상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가문 독립운동에 헌신한 가문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대의를 위한 죽음’을 다짐하며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모두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조선 땅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문가, 안락한 삶이 보장된 신분을 버리고 이들 형제는 몇 대가 풍족하게 쓸 전 재산을 처분해(현재의 가치 6백억 원으로 추정) 망설임 없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운용했다.

6형제 가문은 만주 용정촌 서전서숙 설립에 참여하고 1907년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발족했으며,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했다.


헤이그 특사 실패 후 일가는 국외에 독립기지 마련을 결심하고 1910년 12월 여섯 형제와 가족, 노비 등 50여 명이 한겨울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했다. 이들은 만주 유하현 삼원보라는 곳에 정착해 이주동포들의 정착과 농업 지도를 돕는 ‘경학사’를 조직하고,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 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이 강습소는 1919년 설립돼 무장 독립운동의 씨앗이 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고종의 국외 망명을 계획했으나 1919년 고종의 급사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후 베이징, 상하이 등 각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1924년 항일운동 행동 조직인 ‘의열단’을 후원했으며 ‘신흥학우단’에서 파생된 ‘다물단’을 조직해 지도하고, 김좌진 장군과 함께 ‘재만 한인한족연합회’를 조직해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32년 지하 공작망을 조직할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가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심한 고문 끝에 옥사할 당시 이회영 선생의 나이는 66세였다. 막내 이호영 선생과 그 가족은 1933년 북경에서 행방불명되었고, 둘째 이석영 선생은 1934년 상해에서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남인 이건영 선생은 1940년 병사하고, 6형제 중 광복 후 조국 땅을 밟은 건 다섯 째 이시영 뿐이었다. 이들 6형제의 아들, 딸들도 항일 투쟁의 일선에서 투쟁을 전개했다. 만주로 망명할 당시 50명이 넘던 일가 중 20여 명 밖에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문이 겪었을 고초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망설임 없이 내려놓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온몸을 던진 6형제 가문의 헌신을 기려 3·1문화상의 특별상을 수여한다. 당대의 명문대가가 전 재산과 온 가족을 조국 독립운동에 바친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로 다 표현되지 않을 만큼 숭고한 것이다.